사회

정의에 대하여. 센델의[정의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사람조아 2022. 12. 2. 08:46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다 좋은 책은 아닙니다. 학우들에게 권하지 않는 책이 있습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이 책은 우리나라 인문학 저서들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샌델의 이 책은 지레짐작과 넘겨짚음으로 가득합니다. 고전 정치철학에 대한 피상적 이해와 잘못된 독해가 너무 심해 학우들에게 읽지 말라고 권합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플라톤부터 롤스에 이르기까지 정치사상사의 핵심 주제입니다.
자유, 평등, 좋음, 도덕, 의무, 권리 등등 모든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의 주요한 용어, 가치들은 비교적, 즉 정의에 비해서는 개념 규정이 그나마 정도 차이는 있지만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정의는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학자도 정의의 개념에 대해 성공적이고 일목 요연하게 제시한 적이 없습니다.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가장 일목요연하게, 그나마 잘 정리한 저작은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입니다. 공리주의 마지막 편의 주제가 정의입니다. 하지만 밀조차도 정의 개념에 대해 독자적인 어떤 규정을 유보합니다. 다만,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홉스, 아담 스미스의 정의개념, 즉 정의관을 나열하는 데 그칩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시사점이 있습니다. 밀은 정의는 어떤 감정, 비분강개의 감정에서 비롯되는 어떤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정의 개념이 서양 정치철학에 고유한 독점적 개념은 아닙니다. 동양에서 정의, 의로움은 맹자가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맹자는 인간이 타고나는 네 가지 선천적 단서를 듭니다. 인의예지의 기초가 되는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입니다.
여기서 의로움의 기초는 수오지심입니다. 부끄러운 줄 알라. 부끄러운 것을 피하는 마음이 의로움의 발단이라는 것입니다.

밀의 공리주의 마지막 편, 정의에 대한 주장은 어쩌면 맹자의 수오지심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가 살면서 맞닥뜨리는 어떤 부정의한, 혹은 부조리한 일에 대한 분노와 거부감이 정의의 기초라는 것입니다.

데이비드 흄은 영국 철학사에서 홉스와 밀과 함께 3대 거장으로 꼽힙니다.
흄은 도덕의 기초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도덕판단의 기초가 되는 감정은 인간의 모든 감정이라기보다 – 흄에 의하면 – 차분하고 응당한 정념입니다.
옳지 못한 일에 대한 분노,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에 대해 누구나 느끼는 공감. 흄의 이 주장은 정의 개념을 파악하는 데 힌트를 제공합니다. 아마 밀도 흄의 그 주장을 의식한 듯 싶습니다.

정치철학사의 영원한 숙제이자 최종적 숙제지만 정의 개념에 대해 아예 논의를 회피한 학자도 많습니다.
놀랍게도 영미권 경험주의를 대표하는 로크와 독일 철학을 대표하는 칸트는 정의 개념에 대해 별다른 논의를 하지 않습니다. 해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계몽주의를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학자 마르크스는 아예 정의를 냉소적으로 제쳐 놓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정의는 존재합니다.

정의란 무엇일까. 마땅히 인간이 해야 할 일에 대한 직관적 감정, 그리고 그에 해당하는 정당한 이성적 판단의 종합이 아닐까 싶습니다.
정의개념에 대해 플라톤은 각자 자기 일을 하는 것, 지혜, 용기, 절제의 총합이라고 두루뭉술하게 규정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나마 구체적으로 일반적 정의는 모든 성격적 덕, 즉 절제, 용기, 자유인다움, 우정 등의 총합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홉스는 자연법을 준수하는 것이라고, 역시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하게 규정합니다.

모든 것을 종합할 때, 그리고 우리가 언뜻 떠오르는 어떤 생각, 즉 직관적으로 생각할 때 정의는 이성과 감정을 아우르는, 혹은 초월한 올바름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라면, 배웠든 배우지 못했든, 누구나 가지는 올바름에 대한 염원의 감정적 느낌, 그리고 그에 수반된 이성적 판단의 종합이 바로 정의일 것입니다.

약자가 부당하게 겪는 설움에 대한 공감, 강자의 횡포에 대한 분노, 그 공감과 분노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약자가 약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약자의 선택이 아닙니다. 강자의 횡포는 또한 그 강자가 누려야 할 권리나 응분의 자격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보통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사회적 강자는 그 사람이 어릴 때부터 열심히 노력한 결과이니 정당한 것, 즉 정의로운 것이다라고. 그렇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은 그 사람의 가정환경에 힘입은 바 큽니다. 또 반문할 수 있습니다. 가난하고 불리한 집에 태어났지만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강자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강자가 된 것은 정당한 것이 아닌가라는 반문. 이 또한 그렇지 안습니다. 그런 사람도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에 영향을 준 어떤 사건, 학교 선생님, 친구의 독려 등이 작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의지와 노력을 가능케 한 그 사람의 선천적 재능과 정신력도 실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회적 강자가 되었다 한들, 적어도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기회, 더 우월한 권리, 더 우월한 이득을 주장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런 생각은 누구나 공감하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은 흄과 밀을 거쳐 롤스에 이르러 종합됩니다. 롤스는 칸트주의자이지만 칸트를 곧이곧대로 계승하진 않습니다.
칸트는 도덕의 최상 원리로 ‘의지의 자율성’을 듭니다. 인간은 동물과 같은 욕구를 지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욕구, 그 이기심을 물리치고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존엄하다라고 말합니다.
롤스는 칸트 윤리학의 보편성과 필연성보다 ‘자율성’을 주목합니다.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라는 데서 희망과 가능성을 찾습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힘들고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다는 데서 희망을 안고, 가능성을 찾습니다.
할 수 있지만, 하기 힘든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힘들지만 우리는 할 수 있고, 해야 하기 때문에, 그리고 우리 수오지심이 명령하기 때문에 차마 부끄러운 짓은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신과 같은 완벽한 존재는 아니지만, 신을 닮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그 느낌, 즉 수오지심과, 우리의 그 이성적 판단, 즉 옳음을 향한 우리 생각이 우리에게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에게 말했습니다. 정의가 승리하는 나라를 만들자.
저는 대통령의 유훈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악은 선에 굴복하지 않는다. 힘에 굴복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대통령은 힘을 내놓고, 선으로만 정의로운 나라를 만들려 노력하다가 비명에 갔습니다.
고졸.., 상고 졸업 학력 때문에 야당은 물론 집권 여당 정치인들에게도 무시 당한 대통령. 하지만 대통령은 정의와 진리를 궤뚫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에 대한 그리움은 부끄러움입니다. 수오지심은 우리 마음 속에 말없이, 속삭입니다.

마키아벨리와 홉스의 교훈, "힘을 갖지 못한 정의는 악당에게 당한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입니다.

ㅡ 안동대학교 이창희 교수 페이스북 글 인용